“서울 자가”와 “대기업 다닌다”는 문장이 품은 묘한 긴장
『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』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. 강남 아파트, 안정적인 연봉, 똑 부러지는 사회생활, 그리고 퇴근 후 한강 뷰에서 마시는 와인 한 잔.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이상화된 이미지를 정면으로 깨뜨리며 시작된다. '서울 자가'라는 말은 그 자체로 상징이 되었고, '대기업'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단순한 직장을 넘어서 일종의 신분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. 그런 배경 속에서 김 부장이란 인물은 현실을 사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처럼 등장한다.
저자 송희구는 직장인들이 일상 속에서 외면하거나 애써 무시하고 살았던 감정, 그리고 그들이 처한 사회 구조의 아이러니를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낸다. 김 부장은 흔히 말하는 ‘성공한 인생’을 살아간다. 서울에 집도 있고, 대기업도 다닌다. 그런데 왜 그는 행복하지 않을까? 이 책은 그 물음에 천천히, 하지만 날카롭게 접근한다. 단순한 부장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,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‘김 부장’ 일 수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.
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출간 직후 각종 커뮤니티에서 ‘현실 고증 소설’로 불리며 화제가 되었다는 점이다. 많은 직장인들이 책을 읽고 “이건 내 이야기 같다”며 공감했고, 실제로 어느 대기업 부장이 책을 읽고 퇴사 후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. 직장인의 현실을 이토록 적나라하면서도 위트 있게 풀어낸 책은 드물다.
‘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’는 말의 실체
김 부장의 이야기는 평범한 듯 특별하고, 특별한 듯 평범하다. 이 책은 그의 하루 일과, 상사와의 갈등, 회식자리에서 느끼는 허탈함, 가족과의 거리감,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감까지 세밀하게 그려낸다. 단순한 푸념이나 넋두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, 그 속에서 한국 사회 직장 문화의 본질을 통찰하는 힘이 있다.
작가는 김 부장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. 대신 그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묻는다. 예를 들어 ‘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얻은 게 과연 무엇일까?’, ‘왜 우리는 행복을 뒤로 미루고 살까?’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. 이런 질문은 단지 직장인들뿐만 아니라,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모든 성인들에게 울림을 준다.
책 중간중간 등장하는 회상 장면이나, 김 부장이 바라보는 후배 사원들의 태도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묘한 불편함을 안겨준다. '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'라는 생각과 함께, ‘그래도 이 삶을 유지해야만 한다’는 체념이 동시에 자리 잡는다. 이런 감정의 교차는 이 책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다.
심지어 책 속에는 김 부장의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온라인상에서 밈으로 유행하기도 했다. “한마디만 하자면 말이야…”로 시작하는 그의 술자리 멘트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실제 패러디될 정도로 유명해졌다. 이처럼 책은 현실의 연장이며, 현실은 곧 소설이 된다.
‘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기에’ 담긴 씁쓸한 위로
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, 독자에게 직접적인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는 점이다. 요즘 트렌디한 자기계발서처럼 ‘당신은 소중해요’라고 말하지 않는다. 오히려 조용히, 그러나 진심으로 ‘그래도 살아내느라 수고했다’고 이야기한다. 그 방식이야말로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.
책 후반부에서 김 부장이 혼잣말처럼 중얼대는 장면이 있다. “서울에 집 한 채 있고, 월급 따박따박 받는데… 왜 이렇게 허하냐.” 이 문장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. 특히 MZ세대 독자들은 이를 두고 ‘부의 기득권도 결국 감정의 무게를 지울 수 없다’는 현실을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다는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.
이 책이 단순히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데 그치지 않고, ‘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’는 메시지를 조용히 품고 있다는 점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. 작가는 김 부장의 삶을 조롱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.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, 그 안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가치들을 스스로 발견하게 한다.
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,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. “나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?” 김 부장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,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작지만 묵직한 응원일 것이다.